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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 장애인 이야기-남경욱]숙명을 넘어선 도전 <마당을 나온 암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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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기간 (사업내용 개발 후 작업 예정)
등록일 2020-08-05 오후 8:06:34

숙명을 넘어선 도전 <마당을 나온 암탉>

 

 

남 경 욱

단국대학교 특수교육과 연구교수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 포스터 이미지 : 2011년 한국영화의아름다운도전

2011년 국산 애니메이션 한 편이 2백만 관객을 돌파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영화의 제목 <마당을 나온 암탉>(이하 마당)을 처음 들었을 때 필자의 뇌리에 먼저 떠오른 것은 흥미진진했던 헐리웃 영화 <치킨 런>의 숨막히는 탈주극이었다. 그래서 <마당>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상상으로 관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달리 <마당>은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다른 관객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마당>은 우리가 감당하기에 버거워서 자주 외면하는 숙명과 도전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영화 후반부에 양아들 초록이가 무리의 파수꾼이 되기 위해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그런대로 오락적 연출이라 할 수 있겠지만 영화 전반에 흐르는 내용은 주인공 암탉 잎싹이의 숙명과 같은 고된 삶과 다소 주제넘는(?) 도전에 관한 것이었다.

 

장애와 관련된 분야에 종사하는 필자의 직업의식 때문일까? 세상을 감당하기에는 시작 출발부터 너무 무력했던 잎싹이를 보면서 장애를 지닌 분들의 고충이 떠올랐다. 그와 관련해 떠오른 몇 가지 단상들을 적어보았다.

 

 

 

하나!

모두가 주연이 될 수는 없다.

 

세상에는 부와 권력을 쥔 사람들이 있다. 깊은 지식이나 고도의 기술을 가진 사람도 있고 운동이나 예술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들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는 잎싹이처럼 하늘을 날지도 수영을 하지도 못해 주연이 되기엔 부족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 중에서도 능력상 많은 불리함을 지닌 장애인들은 주연 역할을 따내기가 더욱 어렵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성경을 펼쳐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나 자신일 뿐인가, 아니면 내가 우리의 일부인가?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적 시각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이 세상과의 관계를 바라본다면 이 세상의 주연이 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둘!

그러나 누구나 주역이 될 수는 있다.

 

주연이라는 말의 의미가 주목받는 특정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라면 주역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 위치가 어디가 됬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아들 초록이는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가 되듯이 주연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능력의 소유자다. 세상은 초록이를 주목했다. 그러나 초록이가 주역은 아니다. 비천한 능력이지만 마당을 탈출해 어울리지도 않은 양아들의 능력을 꽃피우게 한 잎싹이가 진정한 주역이라 할 수 있다.

 

일전에 배우 송강호씨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배우들이 주연을 꿈꾸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자신은 단역을 맡는다 할지라도 자신이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해 그 영화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겠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싸웠던 무명의 독립투사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진정한 주역이듯 능력여하를 막론하고 우리에게는 주역이 될 수 있는 길이 항상 열려있는 것이다.

 

 

셋!

도전 속에 답이 있다.

 

가만히 앉아서 주는 모이만 먹고 알을 낳으면 되는 잎싹이가 세상으로 나가려 했다. 마당에있던 가축들과 늪에서 만난 야생동물들은 잎싹이의 무모한 행보를 빈정댔다. 그렇지만 잎싹이는 꿈을 버리지 않고 목숨을 건 도전을 감행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들면서 다른 생명까지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잎싹이의 비참한 최후를 두고 마당에 있던 가축들이 비웃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라, 누가 더 불쌍한가? 인간의 노예로써 굴종의 열매만 따먹고 있는 가축들이 몇 배는 더 불쌍해 보인다. 잎싹이는 이미 세상의 평가잣대로는 잴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지향주의만큼 세속적인 것은 없는 듯 하다. 요새는 좀 수그러들었지만 한 때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의 성공신화를 집중조명한 적이 있다. 일부는 연예인처럼 이름이 알려졌고 이 사회의 조명을 받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별한 사례에 대한 호기심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그분들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의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서 지나치게 결과만을 조명했다는 것이다. 그분들을 바라본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이 도달할 수 있다거나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오히려 조명이 꺼진 지금 그들이 겪을 심적 고통이 걱정될 뿐이다.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있을 때 우리는 도전의 과정에서 결과에 관계없이 주역이 되어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우리 사회에는 도전에 성공한 사람들보다는 실패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아쉬운 것은 그들이 다시 설 수 있도록 마련된 체계적 대책이 미약하다는 것이다. 이 사회가 지금보다는 더 따뜻한 손길로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열어주길 희망한다. 도전이 가능하고 결과에 상관없이 도전 그 자체가 격려받는 사회는 분명히 건강하고 미래가 기대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마당을 탈출해 세상으로 나온 잎싹이는 주연으로 서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지금 자신도 주역이 되기 위한 도전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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